"용사님, 태세우스의 배라는거 알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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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3 추천 0 23.06.21 (수) 14:38






단상 위에 쓰러져 있는 나에게, 성녀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머리가 어지러웠다.

 

하지만 성녀가 말한 개념은 알고있었다.

 

 

 

그건 내가 살던 세계의 유명한 철학문제였으니까.

 

 

 

이야기는 이렇다.

 

옛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테세우스라는 영웅이 타고 다니는 배가 있었다.

 

 

 

많은 전투를 치르고, 긴 세월을 보내며 배는 고장나는 부분이 하나씩 생겨났고 그때마다 배는 망가진 부품을 새로운 것으로 교체했다.

 

 

 

그리고 너무 많은 부품을 교체한 배는 오늘날에 이르러 처음 배가 탄생했을때 갖고있던 부품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는 이야기.

 

 

 

'근데, 그걸 말해준 기억은 없는데...'

 

 

 

몽롱하게 위를 올려다보고 있으니 성녀는 나긋한 목소리로 혼자 말을 이었다.

 

 

 

"네, 맞아요. 그 이야기의 요점은 '본질이란 무엇인가'예요.

 

 

 

저는 처음에, 본질이란 교체할수 없는 부분에 있다고 생각했어요.

 

 

 

배로 따지자면 용골이죠. 사람으로 치면 뇌와 심장이예요.

 

낡은 판자를 교체하듯이 잘린 팔도, 내장도 신성력으로 접합하고 교체할수 있지만 뇌와 심장만은 신성력으로 치료할수 없으니까요.

 

 

 

저희 교단에서는 심장에 여신님이 내려주신 영혼이 깃들어있고, 뇌에는 그 사람이 무럭무럭 키워온 자아가 깃들어 있어서 그렇다고 말해요."

 

 

 

"무슨 말이야.."

 

 

 

성녀가 하는 말의 진의를 파악할수 없었다.

 

힘없이 말대꾸 하니, 성녀는 간단하게 보여주겠다는듯 손짓했다.

 

 

 

[어린양이여. 고통에 몸부림 치지 마십옵소서.]

 

 

 

부욱!

 

 

 

"으으윽..!!"

 

 

 

손에 들려있던 작은 칼로 내 배를 쪼개는 성녀.

 

성언을 이용해 내 몸을 마비시킨것 같지만 갈라진 뱃속에 손을 집어넣고 능숙하게 장기를 뒤적거리는 성녀를 보고 있으니, 말 그대로 속이 뒤틀리는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러던가 말던가... 성녀는 웅덩이 속 조약돌을 꺼내듯 내 심장을 꺼내들었다.

 

 

 

"사실, 용사님과 함께 지낸 이후로 용사님을 치료할때마다... 장기를 하나씩 제껄로 바꿨어요."

 

 

 

"뭐...?"

 

 

 

"처음엔 신장. 그 다음엔 폐, 그 다음엔 비장, 소장, 간, 자궁... 심장을 제외하고 모든 장기를.

 

 

 

처음엔 많이 편찮으셔서 저도 많이 걱정됐지만, 지금은 용사님 장기인것처럼 멀쩡하게 사용해주고 계셔서 저, 정말 기뻤어요.

 

 

 

언젠가 용사님께 들켜버리는게 아닐까, 미움받고 내쳐지는게 아닐까... 걱정했었는데.

 

저희가 무사히 한몸이 되어가는것 같아서 너무 좋았어요."

 

 

 

"그게 무슨... 허억... 개소리야, 미친년아..."

 

 

 

머리가 빙글빙글 도는것만 같았다.

 

내 장기를 누구 마음대로 갈아끼웠다고?

 

지금까지 아무런 의심 없이 믿고 있었는데. 

 

믿고 내 몸을 맡기고 있었는데.

 

동료라고 생각했는데...!!

 

 

 

광기에 가득찼다고밖에 설명할수 없는 고백에 내 머리로 피가 솟꾸치는것만 같았다.

 

속에서부터 욕지기가 쳐올라 증오하듯 성녀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눈물을 흘리며 울음을 터트리는 성녀.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용사님... 제발 그런 눈빛으로 보 지 말아주세요. 사랑해요..."

 

 

 

"왜... 왜 이딴짓을 하는건데? 씨 발, 당장 내 심장 내려놔..."

 

 

 

"안돼요, 그럴수 없어요."

 

 

 

"왜!"

 

 

 

"용사님은... 오늘 마왕에게 죽음을 맞이하기 때문이예요."

 

 

 

"... 뭐?"

 

 

 

다시한번 내 머리를 때리는듯한 발언이었다.

 

내가 죽는다고..?

 

 

 

"저는 여신님의 축복으로 불멸의 영혼을 가지게 됐어요.

 

육체의 불멸이 아니라 존재론적 불멸.

 

제가 죽으면 세계는 회귀해요. 제 인생이 바뀌어버린 그 순간으로...

 

 

 

오늘 용사님은 마왕과 함께 공멸해버리고 말아요.

 

저도 처음엔 이런 권능이 있는줄도 몰랐고, 용사님의 죽음을 받아들이려고 했지만.

 

 

 

용사님이 없어진 세상은 너무 끔찍해요.

 

욕심 많은 돼지들과 의미없는 하루하루가 계속돼서 저는... 저는..."

 

 

 

이번엔 성녀에게서 짙은 탈력감과 외로움이 느껴졌다.

 

 

 

내가 없는 세상을 살아온 성녀.

 

 

 

그곳에서 성녀가 무엇을 보고 느꼈는지, 무슨일이 있었던건지 알수 없었지만 심장을 쥐어진 탓일까, 떨리는 손 끝에서부터 성녀의 감정이 느껴지는것만 같았다.

 

 

 

지독하게 믿기 힘든 소리지만, 믿지 않기 어려운 느낌이었다.

 

 

 

"그러면 이런 방법이 아니라도, 마왕과 싸우러 오지 못하게 했음 됐잖아..."

 

 

 

"저도 그렇게 해봤어요.

 

하지만 몇번이나, 몇번이나 다시 살아봐도, 죽지 않도록 대비를 해봐도, 아예 용사와 성녀라는 이름을 버리고 아무도 없는 곳으로 떠나더라도 용사님은 이곳으로 돌아와요.

 

 

 

그리고 죽어요.

 

제가 영원히 닿을수 없는 죽음 저편으로 사라져버려요."

 

 

 

그렇게 말하는 성녀는 내 심장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지금 느껴지는 감정은 분노일까.

 

원망일까,

 

슬픔일까...

 

 

 

기괴하게 뭉그러진 성녀의 감상은, 나로서는 이해할수 없는것이었다.

 

 

 

"릴리스..."

 

 

 

"그러니 제발 용서해주세요. 아마 평생 용서받지 못하겠지만... 용사님을 살릴수 있는 방법이, 이젠 이것밖에 남지 않았어요. 죄송해요."

 

 

 

"그래서 뭐야, 나랑 하나가 되기라도 하겠다는거냐? 날 영원히 잡아 가두기라도 하겠다는거야?"

 

 

 

"아뇨. 아까도 말했잖아요. 이건 태세우스의 배예요."

 

 

 

다시한번 웃으며 대답하는 성녀.